적성은 내륙의 반도이다
반도란 반쪽만 섬이란 뜻이다. 섬은 동서남북 사면이 강이나 호수 또는 바다로 이루어진 곳을 섬(도)이라 칭한다.
예를 들면, 제주도, 여의도, 남이섬, 시루섬...등이 있다. 단양군 적성의 지형은 동북쪽을 제외한 동쪽은 도담호, 남쪽은 단양호, 서북쪽은 청풍호가 둘러 감싸고 있고, 그 강물로 감싸 안은 것도 모자라 동쪽은 천주산, 남쪽은 말목산, 서북쪽은 금수산, 동북쪽은 칠성봉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축조된 성곽 모형의 지형을 갖추고 있어 지명을 적성이라 명명했나 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외부로부터의 침입이 용이하지 않아서 전략적 요충지로서 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아닐까? 뿐만아니라 태풍ㆍ지진 등 풍수해 및 조류 독감, 구제역 등 전염병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 곳이 적성이다.
금수산은 큰 바위 얼굴이다
금수산 정상의 산세가 사람의 얼굴상을 하고 있고, 한자로 벼슬 품계 품(品)자 형상을 하여 예로부터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금수산 정상을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하여 일명 여인봉이라고 하여 산아래 남근석 공원을 조성하여 놓았으나, 저의 그간의 공부를 기반으로 분석한 결과 여인상이라기 보다는 남성상에 가깝다.
금수산 정상 봉우리 바로 턱 밑에 불룩 솟은 부분을 여성의 가슴으로 판독하여 여인상이라 판정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히 보면 그곳은 가슴 부위가 아니고 쇄골이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배꼽 아래 남자 성기처럼 솟아오른 부위까지 넓게 판독하면 금수산 정상 부분은 남성에 가깝다.
어쩌면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가진 금수산은 중성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신성을 가진 것은 중성 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어서 금수산은 큰 인물을 배출하는 큰 바위 얼굴을 하고있는 신성한 산 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열두명의 걸출한 인물이 난다하여 열두품달이라 했던 것인데, 12명의 걸출한 인재 중 현재까지 3정승(영의정 - 이산해, 영의정 - 유척기, 역동(易東) - 우탁 선생)을 배출 함으로서 앞으로 큰 인물들이 더 배출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산세적으로 큰 인물의 산실
적성의 주산인 금수산을 중심으로 우측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벼락봉이 늠름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위대한 탄생을 알리는 축포(빛과 소리)를 터트릴 태세를 하고 있다.
금수산 좌측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칠성봉이 명확하게 솟아, 큰 인물의 탄생을 칠성신에게 빌고 있으며 북두칠성을 빛을 반짝이고 있다. 그 칠성봉 뒤 작성산에서 까치들이 기쁜 소신을 전하려 지저귀고 있다.
동쪽에는 천주산이 하늘의 기운을 빌어 외부의 침입을 막고 새 생명의 탄생 처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말목산에서 말을 탄 장수가 뒷걸음치는 말목을 쳐가며 외부 침입자들과 전투태세를 갖추고 큰 인물의 산실을 호위하고 있다.
적성은 이와 같은 친위부대 산들이 철통같은 호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한 번 더 강물로 2차 방어진을 구축하고있는 것이다. 참고로 단종이 유배 가 있던 영월의 청령포와 흡사한 지형인 것이다.
이와같이 첩첩이 산과 강이 호위하는 천하제일 명당이기에 토정 선생이 정착하여 흙으로 정자를 지에 놓고 당대 유명인사들과 정담을 나누고 국가의 미래를 논한 것이 아니겠는가.
전략적ㆍ군사적 요충지 - 적성
적성 금수산 능선에서 좌측으로 따라가다 보면, 서북 방향을 감시하는 큰 문이 보이고, 좀더 내려가면 작은 문이 보인다.
이곳을 옛사람들은 큰 문악, 작은 문악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이 바로 산 넘어를 감시, 감찰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석문인 것이다.
적성면의 절반은 금수산 자락으로 둘러싸여 있다. 금수산 접경에 축조된 산성은 발견된 것만 무려 8곳이다.
가은산성(성곡리), 애곡산성(애곡리), 상리산성(상리), 가혜성(금수산), 동대성(금수산), 석토성(성곡리), 견제산성(금수산), 작성산성(금수산)이 있다. ※가은산. 작성산은 금수산을 모산으로 하는 산이다.
충북에 축조된 산성 61곳 중 17곳이 단양군에 축성되었고, 그중에 8곳이 적성면 금수산 접경에 축성된 것으로 보아 적성은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가 분명하다.
적성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땅이었던 적이 있고 마한(백제)의 땅인 적도 있으며, 신라 진흥왕이 이곳 적성을 차지하고 적성비를 세운것으로 보아 삼국이 번갈아 가며 적성을 자국 영토로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국력을 소비했는지 가늠하기 충분하다. 삼국의 접경지로서 군사적 ㆍ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했던 것이다.
전국 최고의 명당 - 적성
적성의 강변 마을인 애곡리와 하진리는 선사시대 때부터 인류가 정착하여 살았던 선사유적지가 처처에서 발견되고 있는 곳으로 한반도에서 인류가 가장 정착하기 좋은 천하 명당이었음을 고증하고 있다.
더하여 토정비결을 집필한 토정 - 이지함 선생이 전국의 명산ㆍ명소를 돌아다니다 정착한 곳이 적성면 성곡리(성골)이다. 이곳에서 토정비결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충남 보령에 있던 선조들의 묘소 다섯 기를 모두 성골(성곡리 오로봉 주변) 옮긴 후, 친조카인 이산해가 영의정에 제수 되었다.
이상과 같이 전국에 풍수 좋고 살기 좋은 명당이 여러 곳 있지만, 풍수. 지리. 음양. 기지. 예언. 비결 등과 관련한 학문이 깊었던 토정 이지함 선생이 그 학식의 결정체인 토정비결을 집필한 곳이 적성이다.
그만큼 한반도에서 가장 안전하고 살기 좋은 곳이며 천하제일 명당이라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단양매일뉴스 조이안 기자]
|